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수 전쟁 (문단 편집) === [[요동성]] 전투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9cb69e64be1a5b790987aaa915e2727e.jpg]] 수나라군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요동성을 포위하고, 이를 공격했지만 '''좀처럼 함락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기록을 보면 요동성 내의 군사들이 가끔씩 [[야전|나가서 싸우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원래 수성전은 성만 끼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전투를 하면서 적군이 후퇴한다 싶으면 성문을 나와서 패잔병들을 처리한다든가 아니면 혼란을 목적으로 공성전 도중에 성을 나와 전투를 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귀주성 전투다. 흔히 생각하는 성문을 굳게 닫고 성벽 위에서 싸우면서 버티는 전략은 농성전이다. 그리고 농성전은 수성전에 속하는 전술로 수성전은 성을 지키는 모든 전술을 총 망라하는 것이며 성을 지키기 위해 공격측의 본진을 치는 것 역시 수성전의 일종이다.] 그러다가 다시 불리해지면 들어와서 성문을 닫고 버티기로 나갔고, 수나라군은 시간이 지나도 요동성 하나를 함락하지 못하며 본래부터 세웠던 전역의 그림이 모조리 엉망이 되어 버렸다. 도하에 성공한 양제는 요동성을 겹겹히 포위하며, 100만이면 함락은 시간 문제라고 판단했지만 [[요동성]]의 병력은 상당히 강한 저항을 했고 '''전쟁 내내 3개월간 수 양제의 공격을 버텨냈다.''' 흔히들 요동성이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라고 생각하지만 요동성은 '''평야성'''이다. 성벽의 흔적이 남지 않아 정확한 성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요동성 무덤의 벽화를 보면 이중성이었음은 확인이 된다. 만약 요동성이 평야에 지어진 게 사실이고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다는 것 또한 사실이라면[* 아무래도 이건 사실로 보이는 것이, 얼마 후에 벌어지는 [[고구려-당 전쟁|여당전쟁]] 중에 요동성이 함락되었을 당시 당군한테 맞서 싸우다가 죽은 사람이 10,000여 명, 체포된 병사가 10,000여 명, 그 밖에 주민이 남녀 40,000명(《신당서》에 의하면 40,000 가구), 성 안의 양곡이 50만 석이었다. 당장 여기 나오는 숫자만 합쳐도 최소 6만 명, 최대 3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성 안에 있었다는 뜻이니 어느 쪽이든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의 대도시였던 셈이다.] 요동 성주와 요동성 장병들은 더더욱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인데, 평지성은 아무래도 방어가 힘들뿐더러 성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성벽의 길이가 길면 길수록.) 방어 측에게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류성룡]]도 《[[징비록]]》에서 평지성과 큰 성은 지키기 어렵다고 말했다.] 당장 [[고구려]]만 해도 이런 이유로 평지의 평시 수도와 산지의 전시 수도로 이루어진 이중 수도를 두었던 역사가 있으며, [[여요전쟁]] 및 [[여몽전쟁]] 당시의 [[고려]],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 등이 적군의 침략 앞에서 수도를 버리고 [[나주]]나 [[강화도]], [[의주]]나 [[남한산성]] 등으로 가서 맞설 수밖에 없었던 큰 이유 또한 바로 이것이다. 근데 이 요동성은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아무리 양제가 덜떨어지게 굴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고려시대]], [[조선시대]]와는 비교조차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물량 공세에 시달리는 와중이었음에도 끝끝내 양제의 대규모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며 시간을 끌었던 것이다. [[양제(수)|수양제]] 항목에 나오듯이 [[고구려]]에서도 중요 지역이라서 [[화강암]]을 통으로 깎아 성벽을 떡하니 올리는 식으로 방어력을 높이기는 했지만,[* 중국의 성은 판축기법으로 만든 벽돌을 쌓아올린 토성이라서 화강암 벽보다 내구도가 부실하다. 그 때문에 중국식 공성전에 특화된 공성무기로 성벽을 부수는 데 실패했다.] [[태종(당)|당태종]]이 요동성을 뚫은 데서 볼 수 있듯 절대적인 이점도 아니었다.[* 다만 당 태종은 후대의 인물이며, 여수전쟁에서의 패배의 원인을 철저히 분석한 채 전장에 나섰다는 차이는 있다.] 결국 이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하나의 기적이었던 셈. 이들의 눈물나는 분전 덕분에 이후 여수전쟁의 승패가 갈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후에 벌어지는 [[고구려-당 전쟁]] 당시에는 [[태종(당)|당태종]]이 침착하게 두들겨대는 통에 무너지는데 여기서 수당군 지휘부의 삽질 여부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뭐 당태종은 하늘이 내린 장수('천책상장')라 불릴 정도로 능력 차이가 크기도 했지만. 아무튼 요동성은 구조적으로 여러 불리한 조건이 있어서, 사실 [[평양성]]의 조정에서도 [[요동성]]이 저리 오래 버티리라고는 생각못했을 것이다. 다만 요동성은 지금의 심양 언저리에 있는데 [[한나라]] 때부터 상당히 크고 견고한 요새가 축성되어 있었으며,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때 [[동연]]이 차지하고 있다가 [[위(삼국시대)|조위]]에게 멸망한 뒤 [[위진남북조]]시대 때 혼란기를 노린 [[광개토대왕]]이 요동으로 진격하면서 빼앗은 성이다. 동연이 멸망할 때 [[사마의]]가 요동을 정벌했는데 이때 사마의가 요수와 양평(요동성)을 정벌하는 데만 100일이 걸린다고 했으니 이렇게 본다면 100일 정도인 3개월을 버틴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다. 그렇지만 사마의의 요동 정벌군은 불과 40,000명에 불과했던 데 반해 수나라의 군세는 100만이라 자칭할 정도로 막강한 군세라는 점에서 비교를 불허한다고 할 수 있다. 수나라 군대의 정확한 규모는 추산하기 어렵지만 전투병이 113만이고 보급대는 그 배라고 했다. 그러나 보급대는 상시 전투병과 함께하진 않으므로 저 두 배라는 보급대를 연인원으로 보면 지속적인 원정 인원은 200만 정도로 잡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수나라 군대 200만 정도면 당시 중국 인구의 5% ~ 7.7%에 해당한다고 한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생산에 종사해야 하는 청년층의 남자라는 것이다. 그들만으로 전 인구의 5% ~ 7.7%를 동원했으니 전쟁을 오래 지속할 수 없음은 뻔한 일이다. 위에서 나온 사마의의 요동 정벌군도 40,000명을 동원했을 뿐인데도 원정 거리가 길어서 조정에서 실행할 수 있을지 고민했을 정도였는데 하물며 100만 대군이라면... 이것이 원인이 되어 후에 그 유명한 '''우중문 별동대'''가 구성되는 것이다. 요동성이 끈질기게 버텨준 덕분에 다급해진 수 양제는 평양 직공을 위해 우중문과 우문술을 위시한 35만 명의 별동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고구려가 방비도 철저했던 것도 있지만, 처음부터 고구려의 계략이 제대로 먹혀 들었던 전투가 바로 요동성 공방전이다. 고구려군은 농성하는 도중 상황이 불리해지면 바로 수나라군에게 항복 의사를 타진했는데, 최고 통수권자인 양제가 친정을 와있는 상황이란 것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당연히 일선 부대 지휘관에서 황제까지 보고가 올라가는 데는 시간이 소요, 또 황제가 신료들과 의논하는데 시간 소요, 항복을 받아들인다고 하든지, 아님 무시하고 계속 공격을 하든지 등의 결정이 내려져서 다시 일선 부대 지휘관까지 명령이 전달되는데 여기에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 등 매번 시간이 깨지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 기간 동안은 휴전이 불가피했고, 고구려 군은 그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요동성의 피해를 복구하고 수비군의 손실을 메우는 데 총력을 쏟았다. 이 원인 제공자는 다름 아닌 수 양제. 그는 장수들에게 >일체 전쟁은 진격하고 정지함을 모두 반드시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 하지 말라. 라고 명령을 내렸고, 덕분에 수나라 장수들은 급하게 싸워야 할 때 감히 멋대로 나서지 못하고 황제의 명을 받느라 기회를 놓쳐버렸다. 급기야 요동성이 함락될 수도 있는 급박한 위기가 올 때, 성 내에서 항복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면 장수들은 감히 싸우지 못하고 항복한다는 요동성의 의견을 성 내에 알렸고, 황제의 말을 듣고 다시 나서려 할 때면 이미 요동성은 다시 수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두고 있는 상태였다.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삼연벙|이런 짓을 '''세 번 연속으로''' 했다.]] 수나라 군대가 병신 집단이 아닌 이상 고구려군이 장난질 하는 게 뻔히 보이는 상황인데도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저항을 중지하고 항복하는 적군은 대국의 아량으로 받아 줘야 한다라는 [[송양지인|대국다운 논리로 이 장난질을 받아줬던 것이다.]] '''물론 그 허세질의 대가는 고스란히 자기들이 뒤집어 썼다.''' 이쯤 되면 양제 입장에서도 분노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의 정복 사업이 쉬웠던 탓도 있었다. 이동식 궁궐을 짓는다든지 하는 위엄찬 방식으로 여러 국가들의 항복을 받아왔던 것. 그에 비하면 고구려 정벌은 애초에 목적 자체가 '''고구려의 완전한 멸망인지, 국왕의 입조인지, 아니면 단순한 복종인지도''' 불분명했다. '''여름이 되었으나 여전히 수나라 113만 대군은 요동성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기만 할 뿐이었고, 단 한 명의 군사도 요동성 성벽을 넘어가지 못했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수 양제는 장수들을 불러 질책하였다.''' >6월 기미(己未)에 수 황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행차하여 성과 못의 형세를 보고 여러 장수를 불러 잘못을 따져 꾸짖어 말하기를 공(公)들은 자신이 관직의 높음을 가지고 또 집안의 지체를 믿고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으로 나를 대우하려 하느냐? 도읍에 있을 때 공들이 모두 내가 오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은 병패(病敗)를 당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공들이 하는 바를 보아 공들의 목을 베려함이다. 공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 내지 않으니 내가 공들을 죽일 수 없을 것이라 여기느냐? 하였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서 얼굴 빛을 잃었다고 한다. 그렇게 수 양제의 무능과 고구려군의 분전이 이어지며 수나라 대군은 요동성 근처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도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자 답답했던 양제는 요동성과 방어선을 구축한 인근의 다른 성들을 건드려보지만 요동성과 같은 전술을 썼는지 어쨌는지 효과가 신통치 않아서 한 개의 성도 점령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